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(문단 편집) === 낙관주의에 빠진 소련군 === 천왕성-토성작전의 연달은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스타프카는 곧바로 다음 공세를 준비시킨다.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초과하는 것이었다. 소련군의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직 전투효율성도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캅카스 수복을 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한다. 이는 딱 1년전 [[모스크바 공방전]] 직후와 [[르제프 전투|유사한 상황]]으로, 그 때도 스탈린은 방어전에 승리하고 독일 국방군 전체를 이긴 것인 양 착각하여 전 전선에서의 반격을 명령한 적이 있었다. 제한적 축선에서 모든 자산을 집중한 반격도 힘들 지경인데 독일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라는 건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었지만 서기장 동지가 까라면 깔 수 밖에 없었다. 일명 '42년 동계 전역'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총반격은 재앙으로 끝났으며 이 때 소련군 피해 덕분에 독일군이 [[청색 작전]]을 감행할 수 있게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.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스탈린을 다시 들뜨게 만들었다.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에서 큰 전환점 중 하나이긴 하나, 그 승리 하나만으로 독일 국방군이 전부 붕괴될 것이라는 건 엄연히 착각이었다.[* 전황 자체는 소련에게 유리해지긴 했다. 저번 후퇴와는 달리 이번엔 B집단군의 핵심인 제6군이 아예 소멸해버린 것이다. 그리고 이제 물량면에서도 독일을 완전히 압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.] 제 6군이 독일 야전군 중에서 상당한 정예부대 중 하나라 할지라도, 대전략 관점에서 냉정하게 따져보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독일군은 기껏해야 1개 야전군 및 제4기갑군과 이탈리아 제8군의 일부였다.[* 여기에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과 함께 되려 1000만을 징발했다.] 또한 독일군은 6군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구출을 위해 러시아 남부로 대독일 기갑척탄사단 등 최정예 국방군 사단과 SS 부대들을 집결시키고 있었고, 이들은 최신형 병기들도 우선 보급받은 상태였다. 즉 스탈린그라드의 손실은 컸지만, 러시아 남부전역 자체는 작전술적으로 아직 독일군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. 소련군에게 더 심각한 것은 [[게오르기 주코프|주코프]]와 [[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|바실렙스키]]같은 [[스타프카]] 수뇌들과 바투틴을 비롯한 전방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. 1942년 겨울, 스탈린이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,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. 스탈린과 [[스타프카]][* 소련군 최고사령부]가 오판을 깨닫건 말건 소련군은 하르코프와 벨고로드,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'별 작전(Operation Star)'과 '질주 작전(Operation Gallop)'을 구상한다. 우선 별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독일 잔존 B집단군을 격파하여 하르코프와 쿠르스크로 나아가는 사이, 질주 작전을 통해 남서전선군, 남부전선군이 후방의 돈 집단군을 분쇄하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